우리는 오랫동안 성씨를 사용해 온 민족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학(譜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인간산맥(人間山脈)의 큰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혈통인가? 이곳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각 성씨의 원조(原組)의 뿌리를 정확하게 캐낸 인맥(人脈)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자료를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제가 이 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賈(가)氏

이 성씨는 소주(蘇州) 가씨 단본으로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그 시원(始原)은 요제(堯帝)가 작은아들 公明을 가(賈)에 봉함으로써 賈로 성씨를 삼게되어, 주나라 혜왕때 가화(賈華)란 사람이 있었고, 한나라 고려 후기에 가수(賈壽)는 랑중령(郞中令)이 되었으며, 진(晋)나라 때 가효(賈孝)는 나라에 공을 세워 가(賈)성을 하사 받았다. 우리 나라의 가(賈)씨는 선조 때에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賈維鍮가 시초라 함.

簡(간)氏

이 성씨는 가평(加平) 외에도 남양(南陽), 서산(瑞山), 영광(靈光), 경주(慶州), 인동(仁同), 배양(裵陽), 해주(海州)등 여러 본이 전하고 있지만 "가평"이 주된 본관이다. 원래는 중국의 성씨로써 간백(簡伯)의 후예로 전하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문헌에 나타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가평간씨의 시조 간유(簡有)는 고려 25대 충렬왕 때 사람으로 중랑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의 후손 간홍(簡弘)이 역시 장군으로 가평간씨의 일파를 이루었고, 또, 간세진(簡世縝)을 파조로 하는 또 다른 일파가 있다.

葛(갈)氏

이 성씨는 제갈씨에서 갈린 성씨라는 설이 유력하다. 신라 덕흥왕 때 귀화한 성인데 고종 때 제갈홍(諸葛泓)의 형제가 복성을 각각 1자씩 나눠 쓰기로 하여, 형은 제(諸)씨로 동생은 갈(葛)씨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역사상 드러난 인물은 별로 없다. 고구려 장수왕 때의 장군으로 갈노(葛盧)란 사람이 있다.

甘(감)氏

감씨는 본관이 합포(合浦)감씨 단본이다. 또는 창원(昌源)감씨로 부르기도 한다. 감씨는 중국의 성씨로써 은나라때 감반(甘盤)이란 사람이 있고 후한(後漢)의 감영(甘英)은 경략가(經略家)로 유명한 반초(班超)의 부장(部將)으로써 안식국(지금의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서 지중해를 건너 로마제국으로 진격하려다가 지세가 불리하여 회군하고 말았지만 중군인이 서아시아에 관한 지식을 넓히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감씨가 우리 나라에 어느 때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합포 감씨의 시조는 고려말 우왕 때 사람인 감위조(甘威朝)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때 감상중(甘尙中)이 문과에 올라 군위현감 (軍威縣監) 시강원전적(侍講院典籍)등을 역임했다.

姜(강)氏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백여 본이 나타나 있으나, 오늘날까지 분명히 전해오는 진주(晋州), 금천(衿川), 안동(安東), 백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봉일(鳳壹), 법전(法田)등 9본뿐인데, 그것도 모두가 대종(大宗)인 진주에서 갈려진 것으로, 다만, 강씨가 모여사는 지방 이름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모든 강씨의 첫 시조가 된다. 시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수(隨)나라 사람으로 수양제(隨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정동대원수(征東大元帥)로 출정했다가 고구려에 귀화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고구려 사람으로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출정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진주강씨의 80%는 강창서(姜彰瑞)의 후손으로 그 가운데서는 강사첨(姜師瞻)의 자손이 가장 많다.

대종파(大宗派)는 시조에서부터 강창서(姜彰瑞)에 이르기까지 계보(系譜)를 달고 있지만 분명치 않고, 은열공파(殷烈公派)의 본을 따르고 있다. 금천강씨파(衿川姜氏派)는 시조에서 강한찬(姜邯贊)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각각 따르고 있으나 모두가 확실하지 않다. 은열공파의 중시조(中始祖)인 강민첩과 금천강씨파의 강감찬은 다같이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세운 병장들이다.

고려 초엽인 성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약 80년 사이에 세 차례나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제 3차 침입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 때 소배압(簫排押) 이끄는 거란 대군을 귀주(龜州) 싸움에서 상원수(上元帥) 강민첩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각각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역사상 유례 없는 대첩을 장식하였다.

강씨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5명, 대제학(大提學) 1명, 청백리 7명을 냈다.

통정공파(通亭公派)

통정공파(通亭公派)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 형제를 꼽는다. 조부인 강준백(姜准伯)은 고려 때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를 역임하였다. 강희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이 되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뒤에 호조참의(號曹參議)를 지냈다. 강희맹은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화가였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직제학 병조정랑을 거쳐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는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도 성종은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찬케 했다. 강희맹은 강희안의 조카이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고 수양대군의 등극을 도와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좌참찬, 우의정,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귀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다.

통계공파

통계공파의 姜동은 세종때 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의 아들로, 성종 때 지평(持平)을 거쳐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으로 있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참화를 입었으나, 그의 세 아들 호(滸), 택(澤), 온(溫)은 모두 영달하였다. 온(溫)의 다섯 아들 가운데 맏이인 강사상(姜士尙)은 명종 때 대제학(大提學),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등을 지냈고, 선조 때에는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의 네 아우 가운데 사안(士安)은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고, 사필(士弼)은 관찰사를 지냈다. 강사안(姜士安)의 아들 강신(姜神)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관찰사, 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다.

강인(姜絪)은 임진왜란 때 왕을 잘 호위하여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적진을 왕래하며 외교로써 공을 세웠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에서는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가 유명하다. 강백년(姜栢年)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효종 때 충청,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백리로 뽑혔다. 그의 아들 강현도 형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강세황(姜世晃)은 강삼(姜三)의 아들로써 육조의 참판을 고루 지냈으며, 특히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강노(姜 )는 강세황(姜世晃)의 증손인데, 철종 때는 대사간을 지냈고, 뒤에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인헌공파(仁憲公派)의 강석기(姜碩期)는 인조 때 우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 명신(名臣)으로는 광해군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사필(士弼)의 아들 정, 명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강현(姜顯) 등을 들 수 있고, 학자로는 강항(姜沆)이 이름났다.

그 밖에 청련하고 강직하여 강경파로 일컬어진 숙종대에서 영조대까지 활약항 인물로는 특히 강석보(姜碩寶), 강복(姜樸), 강필신(姜必愼), 강필경(姜必慶) 등을 꼽을 수 있다. 강석보(姜碩寶)는 현종 때 문과에 올라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강복(姜樸)은 영조 때 부교리(副校理)를 지냈으며, 강필신(姜必愼)은 지평(持平)을, 강필경(姜必慶)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구한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발행인의 한사람인 강위(姜瑋)는 시인으로도 유명했다. 근세에 와서는 독립투사였던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꼽을 수 있다.

康(강)氏

강(康)씨의 본광은 십여본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이 대본으로 오늘날엔 이 세본 이외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강씨의 도시조는 기자조선 시대 기자(箕子)의 막료였던 강숙(康叔)이고, 시조는 전설상의 인물인 호경(虎景)으로 전한다. 그는 신라 말엽의 사람으로 성골장군이라 일컬으며, 백두산으로 부터 각지로 유랑하다가 송도(개성) 부소산(扶蘇山)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았다고 한다. 뒤에 강충(康忠)이란 아들을 낳고 충(忠)은 또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보육이 곧 고려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 되는 사람으로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원덕대왕으로 추존되었다. 하지만, 강씨의 중시조이며 실질적인 시조는 충렬공 강지연(康之淵)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몽고 침입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신성부원군(新城은 신川의 옛 이름)에 봉해짐으로써 신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강씨는 이 강지연(康之淵)의 후손이다.

강득용(康得龍)은 조선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친 오라버니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조에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관악산에 들어가 연주암에 살면서 매일같이 연주대에 올라 송경(松景, 개성)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연주암 연주대의 명칭은 이 때 생겼다. 조선태조는 그를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하고 정안공(靖安公)이란 호를 내렸고, 후손은 재령(載寧)에 관적했다.

강씨는 고려조에 강조(康兆, 목종 때 무신, 도총관)을 비롯 강증(康拯, 예종시 평장사), 강호문(康好文, 공밍왕조 판전교사사), 강순룡(康舜龍, 공민왕와조 찬성사) 등을 배출하여 명문에 속했지만 이조에 와서는 왕후를 냈으면서도 왕자의 난으로 인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조선시대 때 문과 급제자는 36명인데 신천(新川)이 20명, 곡산(谷山)이 7명, 재령(載寧)이 2명, 본관을 알 수 없는 사람이 7명이다.

强(강)氏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원래 중국의 성씨로써 진(晋)나라의 대부 강채(强釵)의 후손으로 전하는데,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江(강)氏

중국 제양(濟陽)에서 남 백익(伯益)의 후예, 강국(江國)이 있어 씨로 정함

甄(견)氏

주요본관은 황?(黃?)이며, 시조는 견훤(甄萱)으로 되어있다. 앞서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 원래 본성이 李씨로써 농사를 짓다가 신라 말기에 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 되어 고을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라 말기에 세력을 떨친셈이다.

그의 아들 견훤은 유명한 후백제의 왕이다. 견훤의 아버지 아연개(阿慾介)는신라 진흥왕의 후손이 되는데, 견훤이 아직 젖먹이 였을 때 밭에서 일을 하면서 그를 수풀 밑에 두었더니 난데없이 호랑이가 나타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자라면서 몸집이 크고 생김생김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 말기에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덕일 때, 여기 저기서 군도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게 되자, 이 틈을 탄 견훤(眞聖女王 6년)은 무리를 모아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끝에 8년 뒤인 효공왕 4년에는 지금의 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그 뒤 후고구려의 궁예와 자주 충돌하고 그 곳에서 떨어져 나온 왕건(王建)의 고려와도 일진일퇴(一進一退)하는 한편,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한 때 군사적으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堅(견)氏

본관은 천령(川寧, 여주지방)과 사양(沙梁, 수원지방), 김포(金浦), 충주(忠州) 등이 있으며,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견권(堅權)이다.

景(경)氏

이 성씨의 시조는 경차(景磋)다. 그는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그의 후손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요직에 있었다. 아들 설정(洩淨)은 보문각대재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설정(洩淨)의 아들 상조(祥組)는 직제학 대사공(大司空)을, 상록(祥祿)은 좌복야를 지냈다. 그의 후손들 중 경기도병마절도사(京畿道兵馬節度使)를 한 경세정(景世貞), 세정의 아들 일창(日昌)은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역임했다. 8세손 세양(世楊)은 조선태조 때 무과에 올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慶(경)氏

이 성씨는 청주 경씨 단본으로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경진(慶珍)이다. 그의 아들 경대승(慶大升)은 의협심이 강하여, 후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른 경복흥(慶復興)이 있다. 그의 두 아들이 조선 개국 후에 각각 벼슬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1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 인물로는 경세창(慶世昌), 경세인(慶世仁) 등이 있다. 경세창(慶世昌)은 선조 때 문과에 올라 부제학(副提學), 황해도관찰사, 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지냈다. 그리고, 경혼(慶渾)은 명종 때 대사간(大司諫), 부제학(副提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부제학 호조참판을 지낸 경섬(慶暹)이 있다.

桂(계)氏

이 성씨는 수안(遂安)계씨 단본으로 명대(明代)의 귀화 성씨로 알려졌다. 시조는 명나라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계석손(桂碩遜)이다. 역사상 대표 인물로는 계덕해(桂德海)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 때의 학자로써 별식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郞) 찰방(察訪) 등을 역임했으며, 문집 계찰방집(桂察訪集)을 냈다. 근대 인물로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화(桂和)가 있다.

高(고)氏

고(高씨)는 양(梁)씨, 부(夫)씨와 함께 탐라(耽羅, 제주도의 옛 이름)의 지배 씨족으로 이들 3성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성혈(三姓穴) 전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과 만물이 없었을 때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신이 솟아났다.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가 그들이다. 그들은 수렵을 하며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와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융성해졌다는 전설이 있다. 결국 삼신 중의 고을나(高乙那)가 고씨의 시조라는 것이다.

앞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씨의 본관은 제주를 대종으로 하고, 장흥(長興),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선령(宣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횡성(橫城), 금화(金化), 토산(兎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0여본이 문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두 제주에서 떨어져 나간 것임에 틀림없다.

제주고씨 세보(濟州高氏 世譜)에 따르면 탐라의 군주는 고을나(高乙那)로 부터 45세(世)까지 高씨가 세습해 내려오다가 46세(世) 고말로(高末老)가 고려 신하가 되니 이가 곧 고씨의 중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 무렵부터 고씨는 속속 육지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고(高)씨중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총 77명인데 본관별로 나눠보면 아래와 같다.

장흥(長興) 29명, 제주(濟州) 28명, 개성(開城) 8명, 안동(安東) 2명, 횡성(橫城) 2명, 강화(江華)·장진(長津) 각 1명, 나머지 6명은 본관이 미상이다.

제주고씨(濟州高氏)

대표적인 인물은 고득종(高得宗)이다. 그는 조선태종 때 효행이 두터워서 벼슬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사판관(禮賓寺判官) 등 벼슬을 지내고 세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두 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로 일본에 가 천황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온 후 한성판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장흥고씨(長興高氏)

고경명(高敬命)으로 이름이 났다. 그는 중종 때 문신이자 화가로 조광조(趙光組) 등과 친교를 맺었다가 을묘사화에 연루된 고운(高雲)의 손자요. 명종 때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그는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에 뽑히고 교리, 옥당(玉堂) 등 벼슬을 지낸 유학자였다. 선조 때 동래부사로 있다가 벼슬을 떠났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에서 6천여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군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개성고씨(開城高氏)

광해군 때 우산판관을 지내고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작자로 전하는 고상안(高尙顔) 등 문신 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영조때 창령현감(昌寧縣監)으로 어진 정사를 베풀어 고창령(高昌寧)이란 별명을 듣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고유(高裕), 조선 중엽의 대표적 시인으로 세조에서 영조 대의 서민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를 엮어낸 고득언(高得彦)이 빼어났다.

 曲(곡)氏

곡(曲)씨의 본은 용궁(龍宮), 면천(沔川)이며, 고려 태조 때에 평찰(評察) 벼슬을 한 곡근회(曲矜會)가 있다.

骨(골)氏

계출이 불명하나 수양제(隋楊帝) 때의 골의(骨儀), 본래 천축(天竺) 사람으로 장안(長安)에 살며 군승(郡承)

貢(공)氏

중국 광평(廣平)에서 남. 아들을 공후(貢後)자(字)로써 씨를 정함.

孔(공)氏

공(孔)씨는 곡위(曲韋) 공(孔)씨 단본이다. 시조는 공자(孔子). 그의 53대손 공소(孔紹)가 고려 충정왕 때 노국대장공주를 수행하여 와서 평장사의 벼슬을 받고 고려에 귀화했다. 조선정조 때에 공자의 고향인 곡위(曲韋)를 관향으로 하사 받았다. 공소(孔紹)의 아들 노(努)는 고려조에 집현전태학사, 평장사 등을 지냈다. 노(努)의 큰 아들 공부(孔府)는 우왕 때 문과에 올라 집현전태학사를 지내고 조선시대에 검교한성부윤과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다. 둘째 아들 공은(孔隱)은 우왕 때 문과에 올라 평장사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한 뒤 은퇴했다. 태종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서?(孔瑞?)은 중종 때의 강직한 신하로 경기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8명이다.

公(공)氏

본관은 김포(金浦) 공(公)씨 하나뿐이며, 시조는 고려 대 장군 공순영(公純永)으로 전한다. 그의 선대는 중국 노(魯)나라 왕족의 후손으로써 공윤보(公允輔)가 18학사의 한 사람으로 난을 피해 신라 경덕왕 14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경기도 김포에 살았다고 한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조선중종 때 사람 공규(公珪)가 있다. 그는 중종 17년에 문과에 합격되여 서작(薯作), 정언(正言)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이르렀는데, 시문(詩文)에 능했다고 한다.

 

郭(곽)氏

곽(郭)씨는 문헌에 6본으로 되어 있으나 오늘날엔 현풍(玄風)과 청주(淸州) 2본 뿐이다.

현풍(玄風) 곽(郭)씨의 시조 곽경(郭鏡)은 원래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 귀화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에 이른 사람이다.

청주(淸州) 곽(郭)씨는 신라 헌강왕 때 시중을 지낸 곽상(郭祥)을 시조로 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다.